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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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6-09-24 15: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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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요한복음서 1:14-18 
설교일 2006-09-24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요한복음서 1:14-18)


■ 들어가는 말씀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정상철 선생님이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참 멋있는 선생님으로 통했었지요. 학년 중간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그분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국어 시험을 치고 나서, 제 자리에 오셔서 틀린 문제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 때 제가 틀린 문제가 뭐냐 하면, “다음 중 한자어가 아닌 것은?” 하는 문제였고, 제가 찍은 답은 ‘양반’이었습니다. 틀린 답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한자어인데, 당시에는 좀 헷갈렸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제 책상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제 눈을 정면에서 바라보시며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양반 할 때, ‘양’ 자는 ‘두 량’자이고, ‘반’ 자는 ‘나눌 반’ 자야. 한자로 이렇게 쓴단다” 하시면서 제 연습장에 한자를 써 주셨습니다.

요즘에는 ‘눈높이를 맞추자!’ 하는 말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해주시는 선생님이 거의 없었습니다. 선생님을 뵐 때는 언제나 위로 쳐다봐야 했었지요. 지금부터 거의 40년이나 전에,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출 줄 아는 선생님이었으니, 얼마나 훌륭한 분입니까?

우리 교회에도 아이들이 여럿 있는데, 어른들이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때는 몸을 낮추어서,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하는 게 좋습니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아이 편에서 보면 자기에게 이야기하는 상대를 편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부담이 적어집니다. 불안감도 적어집니다. 어른 편에서 볼 때는, 몸을 낮추는 순간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준비자세가 됩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와 어른이 훨씬 더 잘 통할 수 있지요.

아이들에게 실험을 한 번 해보세요. 한 서너 살쯤 되는 아이들이, 아끼는 과자를 한 봉지 들고 있을 때, 서서 아이를 내려다보며 아이에게 한 번 말을 붙여보십시오. “나 과자 하나만 줘!” 어지간히 마음 너그러운 아이가 아니면 안 줍니다. 그러나 쪼그리고 앉아서 눈을 정면에서 그윽이 쳐다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해 보세요. “나 그 과자가 참 먹고 싶은데, 과자 하나 안 줄래?” 이렇게 말하면, 평소에 미운털이 안 박힌 상태라면 웬만하면 줍니다.

오늘 요한복음서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했지요? 말씀이 뭡니까? ‘말씀’은 그리스어로 ‘logos’인데, ‘로고스’란 뭐냐, 하면서 여기다가 자꾸 철학 해석을 같다 붙이기 시작하면 복잡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말씀은 세상을 창조한 주체, 곧 하나님입니다. 육신이란 피와 살로 구성된 몸, 곧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이 선언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이 되셨을까요? 높고 높은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낮은 곳에 있는 존재, 유한한 존재, 잠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사람과 한 번 통해보자고, ‘변신’을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육신의 옷을 입으시고, ‘예수’라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다, 이런 등식이 성립하는 겁니다. 이거,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이게 바로 ‘행복한 변신’이에요. 예전에 변신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어땠습니까? 구약성경 읽어 보세요. 사람은 감히 하나님 근처에도 못 갔습니다. 하나님 낌새만 맡아도 다 죽어 나자빠집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을 때도 성소를 만들고, 지성소를 만들어서, 거기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다, 해서 아무나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 이래선 안 되겠다, 생각하셔서 눈높이를 낮추신 사건이 ‘임마누엘’ 곧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신 사건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속 뒤집어질 것 같던 하나님도 행복해지셨어요. 하나님께서 인자하신 모습으로 가까이 오시니까 사람도 행복해졌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순간, 세상의 모든 문제가 일거에 다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해결의 길이 생긴 겁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되신 것처럼 ‘행복한 변신’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또는 자연을 대할 때, 하나님 같은 변신을 하면 참 행복해집니다. 간단하게 몇 가지만 생각해 보지요.

1. 나이의 벽을 넘자.

우리가 행복하려면 무엇보다 나이의 벽을 극복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 어떤 드라마를 보니까, 50대 아주머니와 70대 할아버지의 로맨스 이야기가 나오던데, 아주머니가 화장을 하려다 말고, 내뱉는 대사가 걸작이었습니다. “아이고,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선생님과 내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말이 많은데, 내가 화장을 해서 더 젊어 보이면 어쩌나는 거야? 휴, 내가 지금보다 한 10년만 더 나이 들어 보이면 좋겠네.” 그러면서 화장품 통을 던져버립디다. (진짜 던져버렸는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나이의 벽, 세대의 벽을 넘어야 피차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대부분 세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와 대화할 때는 자식의 세대로 나이를 낮추어서 해야 하는데, 그걸 잘 못합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생각하면 크게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그게 잘 안 되지요. 자식이 부모의 꾸지람을 들을 때나, 부모와 대화할 때는 부모의 세대로 나이를 높여서 임해야 하는데, 그걸 잘 못합니다. ‘나도 나중에 나이 들면 저런 생각을 할지도 몰라’ 생각하면 크게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그게 잘 안 되지요. 피차 노력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 ‘변신!’ ‘변신!’ 하면서 주문을 열 번만 외세요. 자식이 부모를 대할 때도 ‘변신!’ ‘변신!’ 하면서 주문을 열 번만 외세요. 그러면 문제가 지금보다 반 이하로 줄어듭니다.

2. 능력의 벽을 넘자.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9:19-22).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런 겁니다. 많이 배웠더라도, 못 배운 사람 앞에서는 배운 티를 내지 말자, 부자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 앞에서는 부자 티를 내지 말자! 왜 그래야 합니까?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변신을 할 줄 알아야 외롭지 않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3. 처지의 벽을 넘자.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될 수 없지요. (요즘 ‘트랜스젠더’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백색인종과 유색인종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김건모가 “검은 사람들이여, 검다고 그게 다 때는 아니다!” 했다는 농담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흰둥이로 변장한 마이클잭슨보다 김건모가 훨씬 더 멋있습니다. 몸뚱이를 뜯어고치는 것은 변신이라기보다는 ‘은폐’지요.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샙니다만, 텔레비전을 보면 여자들이 대부분 화장을 하고 나오는데(남자도 가끔), 저는 개인적으로 여자나 남자나 화장하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제발 목 색깔과 얼굴 색깔은 좀 비슷하면 좋겠어요. 목은 그대로 두고 얼굴만 하얗게 화장을 하니까 이게 제 눈에는 가면으로 보여요. 왜, 한 때 세제 선전 중에 이런 게 있지 않았어요? “검은 것은 더 검게, 흰 것은 더 희게!”

(죄송합니다. 저도 지금 상당히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여자의 처지가 돼보지도 않고 여자들이 화장하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게 모순이기는 하지만, 남자의 처지에서, 여성들이 남자들의 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쨌든, 처지를 바꾸어보면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추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대화할 때, 남자는 여자의 처지가 돼서, 여자는 남자의 처지가 돼서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대화할 때도,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처지가 돼서,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처지가 돼서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마음을 읽고, 국민은 대통령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경영자는 노동자의 마음을 읽고, 노동자는 경영자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목사는 교인들의 마음을 읽고, 교인은 목사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양쪽 다 행복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 상대방의 처지가 돼서 생각해보고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되셨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에요. 다만 사람과 가까워지고, 사람과 통하기 위해서 눈높이를 맞추신 겁니다. 남자(여자)는 남자(여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여자(남자)와 통해야 합니다. 흰둥이(검둥이)는 흰둥이(검둥이)의 정체성을 가지고 검둥이(흰둥이)와 통해야 합니다.

■ 맺는 말씀

인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의 신을 신고 걸어보기 전에는 그에 대해 말하지 말라.” 시집살이 안 해본 사람은 시집살이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것이고, 노인이 돼보기 전에는 노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는 것이고, 장애인이 돼보기 전에는 장애인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것이고, 고생해보지 않은 사람은 고생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처지가 다른 사람들과는 말도 하지 말고 담 쌓고 살자는 것인가, 그건 또 아닙니다. 형편과 처지가 다르더라도, 눈높이를 맞추면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높이는 누가 맞추어야 하겠습니까? 어른과 아이가 함께 있을 때, 아이가 어른의 눈높이를 맞출 수는 없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있을 때, 가난한 사람이 부자의 씀씀이에 맞출 수는 없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과 조금 아는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무식한 사람이 유식한 사람의 수준에 맞출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사람이 하나님의 전능함과 무한함을 따라잡을 수는 없습니다. 눈높이는 언제나 높이 있는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내려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겸손할 수 있고, 낮아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게 낮아지는 행복이고, 변신하는 행복입니다. 검둥이가, 흰둥이와 눈높이를 맞추어서 흰둥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검둥이가 흰둥이보다 위대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면 여자가 더 위대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냐 여자냐, 검둥이냐 흰둥이냐, 장애인이냐 비장애인이야,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서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더 위대하다는 말이고, 그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이른바 ‘화려한 변신’을 꿈꾸면서 높은 곳으로만 가려고 할 것이 아니라, ‘행복한 변신’을 꿈꾸며 낮은 곳으로 눈높이를 맞추러 가는 진정한 자유인, 진정한 행복남, 진정한 행복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20140110 DDH(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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