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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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8-04-27 1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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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누가복음서 24:44-49 
설교일 2008-04-27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누가복음서 24:44-49〉


■ 들어가는 말씀

머물러 있어야 할 때 머물러 있는 사람은 믿음직스러운 사람입니다. 떠날 때 떠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머물러 있어야 할 때 움직이는 사람은 가벼운 사람입니다. 떠나야 할 때 머물러 있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이 머물 때와 떠날 때를 잘 가려야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면 어떤 때 머물러야 하고, 어떤 때 떠나야 하는가, 이게 쉽지가 않지요.

오늘 누가복음서에 보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24:19).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는 ‘내게로 오라’는 말씀도 있고, ‘머물러 있어라’는 말씀도 있고, ‘떠나가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상황은 ‘머물러야’ 할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머물러야’ 할 때가 언제인가, 이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 첫째, 기도해야 할 때는, 머물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에 머물고 있을 때,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있는 산으로 올라와서, 여기에서 기다려라. 그러면 내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몸소 돌 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너에게 주겠다(출애굽기 24:12). 모세가 자기의 부관 여호수아를 데리고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니까 구름이 산을 덮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구름 가운데를 지나서, 산 위로 올라가서, 밤낮 사십 일을 그 산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율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출가하셔서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가장 먼저 가신 곳이 광야였습니다.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도 밤낮 사십일 동안을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고 광야에 머물렀습니다. 그 후에 악마가 예수님께 찾아와 예수님을 시험하였지만, 예수님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도(道)를 터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서 머물러야 합니다. 물론 이동하면서도 기도할 수는 있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심각한 위기가 닥쳐왔을 때, 그런 때는 머물러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중요한 문제를 지나가다가 만나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반드시 만날 약속을 잡은 후에, 직접 만나서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용건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머물러 있었는가, 한번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마음에 번민이 가득 차서, 홀로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일렀지요. “여기 머물러서 깨어 기도하여라.” 그러나 제자들은 한 시간도 참지 못하고 잠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일을 위해서, 나의 일을 위해서, 머물러서 기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 둘째, 위험을 피해야 할 때, 우리는 머물러야 합니다.

예언자 엘리야사 바알 예언자 수백 명과 대결해서 이겼지요. 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절입니다. 분명히 이기기는 했는데, 이겼다고 끝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에게 망신을 당한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을, 낱낱이 자기 아내 이세벨에게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했습니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열왕기상 19:2).

엘리야는 급히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유다로 도망하여, 브엘세바라는 곳에 이르러, 거기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홀로 하루를 더 걸어서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앉아서 그는,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열왕기상 19:4). 천하의 엘리야도 위험 앞에서는 피신을 하여 광야에 머물렀습니다.

“소나기는 피해 가라!” 하는 우리 속담도 있습니다만, 위험할 때는 피해서 머물러야 합니다. 그 옛날, 야곱이 자기 아버지를 속여서,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혼자서 가로챈 일이 있었지요. 형이 가만히 안 있을 것 아닙니까? ‘아버지 장례만 치르면 내가 저놈을 죽인다’ 하고 벼르고 있으니까, 야곱이 밧단아람이라는 곳에 사는 외삼촌 집에 가서 20년이나 머물다가 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도피성’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율법은 보복법이지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목숨에는 목숨입니다. 살인을 한 자는 목숨을 내놓아서 보복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과실치사’라고 하는 일이 있잖아요?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 고의적으로 살인한 죄인와 똑 같이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도피성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거기 숨어 지내도록 했습니다.

요즘 나온 말 가운데 ‘잠수 탄다’는 표현이 있지요. 자기가 있는 곳도 알리지 않고, 휴대전화도 꺼놓고, 숨어서 지낸다는 말인데, 옛날에도 이런 때 쓰는 말이 있기는 있었지요. 옛날에는 이것을 ‘잠행’(潛行)이라고 했는데, 요즘 말로는 ‘잠수 탄다’고 합디다. 자주 있으면 안 되겠지만, 꼭 그래야 할 때는 그렇게라도 해야지요. 그런데 우리 신앙인은 그냥 혼자 잠수를 타면 안 되고, 하나님과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피신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른 경우이기는 합니다만 천주교회에서 ‘피정’(避靜)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복잡함을 피해서 조용히 지낸다’는 말인데, 우리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일상을 떠나서, 또는 피해서,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다듬어야 할 때는 해야 합니다. 그렇게 ‘도망’하지 않으면 어느 귀신한테 사로잡혀 갈지 모릅니다.

■ 셋째, 능력을 입어야 할 때는,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올해로 치면 5월 1일이 부활 후 4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을 우리는 ‘주님의 승천일’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공기 속으로 사라지신 날입니다. 이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셨습니다. 그 당부 말씀이 누가복음서 24장 49절 말씀입니다.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아마도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말일 것입니다. 그 마지막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머물러 있어라” 하셨습니다.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도망 가지 말고 머물러 있어라, 이겁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이지요. 언제까지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능력을 입을 때까지”입니다. 능력을 입기 전까지는 꼼짝하지 말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누가 줍니까? 성령께서 주십니다.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것이 잘못 되었을 때를 가리켜 우리는 농담으로 “도로 아미타불”이라고 합니다만, 그런데 본디 이 말의 뜻은 십 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하면 “나무아미타불” 곧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진리를 터득한다는 말이지요. 여기에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10년 동안 ‘사람이’ 정진을 해야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공부해서 내공을 쌓고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능력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 기간은 1년이 될 수도 있고, 열흘이 될 수도 있고, 한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머물러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지금까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무식쟁이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자기 나라 말로 다 알아들었다고 했습니다. 영어 몰입교육을 하지 않아도 외국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치병에 걸렸던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나고, 도저히 구제불능이었던 사람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됩니다. 이 모든 일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에 머물렀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 맺는 말씀

오늘 저는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기도하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둘째, 위험할 때는 멈추어야 합니다. ▶셋째,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얼마나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나라만 해도 이동전화가 수천만 대나 됩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머물러 있는 일이 적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몸을 정신없이 돌리다가는 머리까지 돌 수도 있습니다. 멈추어야 할 때는 멈출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늘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241 가을 밤 외로운 밤
240 가을 밤
239 가시밭의 백합화
238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지 마라!
237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236 가난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35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234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십시오!”
233 “하나님을 만들어 주십시오!”
232 “하나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231 “평화가 있어라!”
230 “청춘을 돌려다오!”
229 “천둥과 같은 소리를 들으십시오!”
228 “주님보다 앞서 가서”
227 “주님께서 쉬시지 못하게!”
226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주신 기쁨”
225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224 “일출봉에 해 뜨거든”
223 “이러지 마라, 나는 네 동료다!”
222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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