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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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베드로전서 4:7-11 
설교일 2008-10-19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습니다. 아멘.

<베드로전서 4:7-11>


■ 들어가는 말씀

오늘이 10월 19일이니까, 다음 주일이 지나면 11월에 들어서게 됩니다. 벌써 올해의 ‘마지막’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처음이 있고 마지막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역사에도 시작이 있으면 종말이 있고, 사람에게도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한 해에도 시작이 있으면 마지막이 있습니다. 육상에서도 출발선이 있으면 결승선이 있고, 자동차를 탈 때도 출발지점이 있으면 도착지점이 있습니다.

처음도 중요하고 마지막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전도서에 보면 “일은 시작할 때보다 끝낼 때가 더 좋다”(7:8)고 했습니다.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7:1)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7:2)는 것이지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끝이 좋지 않으면 그의 인생이 전부 오점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별 볼 일 없던 사람이라도 끝이 좋으면 그의 인생이 전부 빛이 납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글쓴이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4:7). 이 말씀은 역사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나온 후 벌써 2천 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이거, 거짓말 아니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서 성경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베드로전서 3:8). 그러면 “에이, 아직 멀었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패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은 “아직 시험이 멀었네!”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일, 아니 지금 곧 시험이 있을 것이라는 자세로 공부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금이 곧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이런 글이 있습디다. “하루하루가 당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인 듯 살아가라. 하루의 삶이 끝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나은 내일을 달라고 기도하라. 당신에게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삶이 더욱 값지고 특별해질 것이다. 모든 일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고, 지금까지 내일로 미뤘던 일들을 더 이상 미루지 않게 될 것이다. 내가 숨 쉬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내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오늘은 소중하다. 오늘 이 순간을 현명하게 보내라.” ― 테리 햄튼 & 로니 하퍼(이은희 역), 《고래뱃속 탈출하기》(도서출판 좋은생각, 2003), 106쪽.

그렇다면, 지금이 마지막 때인 것으로 생각하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 서신에서 잘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조심하여 기도하라는 것, ▶둘째는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셋째는 성심껏 서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7절 말씀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우리가 늘 하는 것이지만, 지금이 마지막인 듯이 살아가는 사람의 기도는 달라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조심하는 기도이고, 정신 차린 상태에서의 기도인가, 그것은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입니다.

대구 동산병원에 원목으로 계시던 김치영 목사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참 인품이 높은 분이지요. 이분이 말년에 간암 진단을 받으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자녀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생각해 봐라. 많은 사람들이 암으로 고통을 겪으며 죽어 가는데, 나만 거기에서 벗어나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옳은 기도겠니? 나는 그런 은총이 오더라도 사양하겠다. 고통과 신음 속에 있는 많은 환자들과 영적인 연대를 가지며 죽음을 맞겠다. […] 병이 낫는 것도 하나님의 기적이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그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기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꼭 낫도록 기도해야 하는 줄 안다. 그런데 주님의 마지막 부름을 순종하며 잘 받아들이는 것도 역시 은혜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김동건, 《빛, 색깔, 공기》(대한기독교서회, 2002), 114-115쪽.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고통이든 죽음이든 감사하며 받겠다는 기도, 그것이 제대로 된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런 기도를 하셨지 않습니까?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마태복음서 26:39).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데, 지금 여기서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베드로 서신은, 마지막 날을 대비해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가르치는데, 어떤 사랑이 뜨거운 사랑인가, 그 답도 같이 써놓았습니다. 8절부터 9절까지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허다한 죄를 덮어 주는 것, 그리고 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 그것이 뜨거운 사랑, 진정한 사랑입니다.

엊그제 어떤 드라마를 보니까, 결혼한 후 30년을 산 여자가, ‘이젠 도저히 못 참겠다, 이혼을 해야겠다’며 이런 하소연을 합디다. “십 년은 멋도 모르고 살았고, 십 년은 마지못해 살았고, 십 년은 죽지 못해 살았다.” 그 대사를 듣고 저도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니까, 십 년은 싸우면서 살았고, 십 년은 조정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십 년은 어떻게 살게 될 것인가, 서로 용납하며, 덮어주며 사는 삶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싸울 것 다 싸웠고, 서로 맞출 것도 어지간히 맞추었으니, 이제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덮어주며 살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나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해야 할 사람끼리 서로 싸우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아직 싸우는 단계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서로 맞추어 가면서 조정하는 단계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서로 용납하며 사는 단계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뜨거운 사랑’의 마지막 단계는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안 가지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용납하는 단계입니다. 비록 상대가 잘못하더라도, 심지어 죄를 짓더라도 다 받아들이는 사랑, 그것이 뜨거운 사랑의 최고 단계입니다.

어느 소설에서 이런 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민둥산의 주인 없는 무덤을 생각해 본다. 내가 죽는 날, 나의 부재를 애통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날도 지구는 돌 것이고, 당신들은 커피를 마실 것이며 서울의 야경은 여느 때와 같이 빛나고 있겠지. 난 누구처럼 유언 없이 죽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시를 써 보지도 못했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했던 대상도 없었다. 슬프다, 감동 없는 삶이.” ― 나상만, 《혼자뜨는 달 5 - 현주의 일기》(도서출판 다나, 1994), 16쪽.

내가 죽었을 때 가장 슬퍼해줄 사람, 그 사람이 나를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죽었을 때 누가 가장 슬퍼할 것인가, 만일 그런 사람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나의 부재(不在)를 애통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 잘못이 아니라 나의 잘못입니다. 내가 그만큼 사랑하며 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사랑’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 성심껏 섬기십시오!

마지막 때를 대비하라며 베드로 서신이 말하는 또 하나의 권면은 이것입니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10).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듯 서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봉사’(奉仕)라고 하면 흔히 남을 돕는 것을 생각합니다만, 남을 돕는 것도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구제’(救濟)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구제’는 강자가 약자를, 부자가 가난한 이를, 돕는다는 것인데, 자칫하면 ‘나는 잘 났고, 너는 못 났으니, 내가 너를 도와준다’는 태도로 보일 수 있습니다.

봉사란 섬김입니다. 자식이 병든 부모를 모시듯, 제자가 배고픈 스승께 음식을 드리듯, ‘남’을 항상 받들어 모시는 태도가 진정한 봉사입니다. ― 정찬주, 《자기를 속이지 말라》(열림원, 2005), 229쪽 참고. 모든 사람을 예수님 섬기듯 하는 것, 모든 사람을 부처님 모시듯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봉사의 자세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 누구를 성심껏 섬길 것인가,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것입니다.

■ 맺는 말씀

끼아라 루빅이라는 사람이 이런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항상 말하게 하소서. 마치 내가 마지막 말을 하듯이. 항상 행동케 하소서. 마치 내가 마지막 행동을 하듯이. 항상 고통을 받게 해 주소서. 당신께 바치는 마지막 고통이듯이. 항상 기도케 하소서. 마치 이 땅 위에서 당신과 더불어 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듯이.” ― 이해인, 《두레박》(분도출판사, 1988), 113쪽.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도 기도를 드려 봅시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이 기도가 내 생의 마지막 기도라는 심정으로 기도하게 해 주옵소서.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서로 용납하는 사랑을 가지게 해주옵소서. 나의 마지막 남은 봉사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섬기듯 서로 받들어 섬기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41 가을 밤 외로운 밤
240 가을 밤
239 가시밭의 백합화
238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지 마라!
237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236 가난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35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234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십시오!”
233 “하나님을 만들어 주십시오!”
232 “하나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231 “평화가 있어라!”
230 “청춘을 돌려다오!”
229 “천둥과 같은 소리를 들으십시오!”
228 “주님보다 앞서 가서”
227 “주님께서 쉬시지 못하게!”
226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주신 기쁨”
225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224 “일출봉에 해 뜨거든”
223 “이러지 마라, 나는 네 동료다!”
222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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