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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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시편 104:6-8 
설교일 2013-04-07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사용처 1. 20240407 한울. 
■ 성서 본문

수많은 사람이 기도할 때마다
“주님, 우리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십시오.”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주십시오.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님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4:6-8>


■ 들어가는 이야기

지금은 좀 괜찮습니다만, 어제부터 오늘 새벽까지 날씨가 꽤 궂었습니다. 그렇지만 4월에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고 해서, 겨울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좀 춥고 을씨년스럽기는 하지만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것이 ‘믿음’입니다. 아무튼 믿음 가운데서 오늘도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돼서 반갑고 기쁩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생명의 기운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가정이 있으면 기뻐하십시오!

우리 전래동화 우렁이 각시 이야기를 아시지요? 농사를 지으며 힘겹게 살던 가난한 노총각 이야기 아닙니까? 논에 가서 일을 하던 총각이 하루는 문득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매일 뼈 빠지게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장가를 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숨을 쉬며 말했지요. “이렇게 고생하며 농사를 지어서 누구랑 먹고 사나?” 그랬더니 어디선가 예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랑 같이 먹고 살지!” 총각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해보았습니다. “이렇게 농사를 지어서 누구랑 먹고 사나?” “나랑 같이 먹고 살지!” 살펴보니 그게 우렁이였고, 그걸 집에 가져다가 독에 넣어놓았더니, 밖에서 일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멋진 밥상이 차려져 있더라, 그런 이야기지요. 혼자 사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말하는 이야기인데, 고독을 느끼는 것에 있어서는 동서고금이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 먹는 밥은, 밥이라기보다는 사료(飼料)다.”

전도서 4:8-11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 한 남자가 있다. 자식도 형제도 없이 혼자 산다. 그러나 그는 쉬지도 않고 일만 하며 산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산도 그의 눈에는 차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끔, “어찌하여 나는 즐기지도 못하고 사는가? 도대체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수고를 하는가?” 하고 말하니, 그의 수고도 헛되고, 부질없는 일이다(전도서 4:8). 핏줄이 연이 되어 한 집안에 같이 사는 사람들을 뭐라고 합니까? 요즘에는 ‘가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표현은 ‘식구’(食口)입니다. ‘한 솥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때가 되어 같이 밥을 수 있는 식구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복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같이 밥을 먹는 것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식구라는 것을 자각하기 위한 일입니다. 전도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전도서 4:9-11). 우리에게 식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 건강하면 기뻐하십시오!

소설가 박범신 선생을 아실 것입니다. 그분의 작품인 ≪은교≫가 영화로 나오기도 했지요. ≪은교≫를 집필한 뒤에 이분은 충남 논산으로 내려가서 거의 은둔하다시피 살고 있습니다. 한 2년 정도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 장편소설을 하나 발표했는데, 그것이 ≪소금≫이라는 작품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지요. 거기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처자식이 딸리면 치사한 것도 견디고 필요에 따라 이념도 바꿔야지. 오늘의 아버지들, 예전에 비해 그 권세는 다 날아갔는데 그 의무는 하나도 덜어지지 않았거든.”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어느 날 애비가 [회사에서] 부당한 걸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박차고 나와 낚시질이나 하고 있어 봐. 이해하고 사랑할 자식들이 얼마나 있겠어? 효도가 비즈니스가 된 세상이야. 그러니 어떤 애비가 배롱나무처럼 살 수 있겠느냐고.” 옛날 아버지들은 가정에서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아버지들은 권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들이 져야 하는 의무는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의 중년 여성들은 시어머니 앞에서는 여전히 기가 죽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며느리 앞에서 큰소리도 못 칩니다. 이래저래 중년 아저씨 아줌마들이 힘든 시절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요즘의 중년층 사람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어려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자연식품을 먹고 자랐다는 것입니다. 1970년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80.5%였습니다. 그 전에는 거의 100%에 가까웠습니다. 그렇지만 2010년 현재 우리나라 곡물자급률은 26.7%입니다. 그나마 쌀 자급률이 높기 때문에 그렇지, 쌀을 빼면 다른 것들은 5%입니다. 거의 모든 곡물을 수입해서 먹는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가 세계 5위의 곡물수입국입니다. 유전자변형식품에다가 농약 범벅인 식품들을 좋다고 꾸역꾸역 먹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요즘 아이들이 불쌍합니다. 그래도 지금의 중년층은 어려서는 제대로 된 농산물을 먹고 살았지요. 그래서 그나마 건강을 유지하고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어제 옛날 서류들을 정리하다가 10년도 더 된 보험증을 발견했는데요, 지금은 해지된 상태입니다만, 거기 보니까 항공기, 선박, 열차로 인해 재해를 당하면 4억 5천만 원, 기타 교통사고로 재해를 당하면 3억 6천만 원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큰돈이지요. 비록 보험료는 나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니까 이 돈을 안 받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몸이 안 좋은 데가 한두 군데씩은 있겠지만, 그래도 마음껏 숨을 쉬면서 살고 있다면 큰 복입니다.

■ 살아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최명희 작가의 ≪혼불≫이라는 작품을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거기 보면 청암부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종갓집 맏며느리이지요. 그는 팔자가 기구해서 시집도 오기 전에 신랑이 죽었습니다. 약혼이 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신랑이 죽었다고 파혼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복을 입고 시집을 왔습니다. 그런데 문중 가운데 인월댁이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박복한 여자였습니다. 첫날밤에 신랑이 바람과 같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하루도 못 살고 신랑이 사라져버렸으니 하소연이 입에 달려 있었을 것 아닙니까? 팔자를 한탄하는 인월댁에게 청암부인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자네 나이와 꼭 같은 열아홉이었어. 나는 그 때… 속으로 그랬었네. 얼굴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신랑을 두고, 죽지만 않었으면 좋겄다, 한평생 만날 일 없이 살어도 좋고, 평생토록 소식 한 자 못 듣고 살어도 좋으니, 어디서든지… 아무 곳에서라도… 나 모르는 어떤 곳에서라도… 살아만 있었으면 원이 없으련만…. 내가 남의 일이라서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닐세. 사람이 살아 있으면, 마음에 품은 원이건 한이건 대상을 삼을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이 세상에 나를 있게 해주는 끈이 되는 것이야…. 대상 없는 허공을 향하여 사는 것보다 더 고달픈 일은 없느니….”

결혼도 하기 전에 신랑이 죽어버려서, 손도 한 번 못 잡아보고 시집온 청암부인 앞에서 그런 하소연을 했으니,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꼴이지요. 첫날밤에 집을 나갔을지언정, 지금 하늘 아래 어디에선가 살아는 있을 터이니, 그것만 해도 얼마나 복인가, 그래도 자네는 그리워하든 욕을 하든 대상이 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닌가, 하는 말에 인월댁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비록 영감이 병이 들어 누워 있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안 그럴지 몰라도,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불평하는 오늘 하루는,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 애타게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다.”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다. 비록 개라고 하더라도, 살아 있으면 죽은 사자보다 낫다”(전도서 9:4).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큰 복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 맺는 이야기

오늘 시편 본문에서 시인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큰 복이요 가장 큰 기쁨이란 이야기입니다. 저는 아침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늘도 평범하고 정상적인 하루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우리에게 가정이 있다는 것, 건강한 몸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어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 하나님 앞에 크게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입니다. 이와 같은 작은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기쁨도 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 끝 날까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해서 사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42 가을 보약
241 가을 밤 외로운 밤
240 가을 밤
239 가시밭의 백합화
238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지 마라!
237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236 가난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35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234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십시오!”
233 “하나님을 만들어 주십시오!”
232 “하나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231 “평화가 있어라!”
230 “청춘을 돌려다오!”
229 “천둥과 같은 소리를 들으십시오!”
228 “주님보다 앞서 가서”
227 “주님께서 쉬시지 못하게!”
»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주신 기쁨”
225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224 “일출봉에 해 뜨거든”
223 “이러지 마라, 나는 네 동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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