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전대환 채널 바로가기

성서본문 요한계시록 19:9-10 
설교일 2013-07-07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오디오파일 듣기/내려받기]

■ 성서 본문

또 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여라.” 그리고 또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다.” 그 때에 내가 그에게 경배드리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말아라, 나도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네 동료들 가운데 하나요, 너와 같은 종이다. 경배는 하나님께 드려라. 예수의 증언은 곧 예언의 영이다.”

<요한계시록 19:9-10>


■ 들어가는 이야기

7월의 첫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달을 셀 때 1월, 2월, 3월… 하면서 숫자를 붙여서 세지만, 서양의 달 이름에는 황제의 이름, 신의 이름, 숫자 이름 등이 섞여 있습니다. 인디언들이 달 이름을 붙이는 것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1월부터 12월까지 각 부족마다 다른 이름들이 있는데요, 7월을 예로 들어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산딸기가 익는 달”(수우족), “나뭇가지가 열매 때문에 부러지는 달”(주니족), “사슴이 뿔을 가는 달”(키오와 족), “열매가 빛을 저장하는 달”(아파치 족) 등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7월은 어떤 달입니까? 무엇이 됐든, 1년 중 가장 멋진 달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빌며 축복합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감사해야 할 일들이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제가 가장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똑 같은 자녀로 대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도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 어떤 결혼식장

요한이라는 사람이 ‘밧모’라는 섬에 감금되어 있을 때 하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마치 꿈을 꾸듯이 요한은 신비한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오늘 요한은 어떤 결혼식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결혼식의 혼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신랑은 그분의 아들입니다. 여기서는 ‘어린 양’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일종의 암호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면 당연히 예수님인 줄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결혼식에 가면 가장 궁금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부이지요. 신부는 누구네 집 딸인지, 뭐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하객들의 관심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신부가 단장을 끝냈습니다. 신부가 등장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면사포에 가려서 얼굴은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신부가 풍기는 분위기는 황홀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그 자태는 거룩하기까지 했습니다. 요한을 안내한 천사가 말했습니다. “신부가 입은 저 옷이 아름답지 않니? 이 모시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야.” 자, 여기서 신부의 실체가 밝혀집니다.

신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짐작하시지요?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입니다. 신부가 입은 아름다운 모시옷을 두고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신부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성도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인물입니다. 요한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저렇게 멋진 결혼식이 있다니!’ 그때 천사가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여라”(요한계시록 19:9). 요한은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 천사에게 경배를 드리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이러지 말아라, 나도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네 동료들 가운데 하나요, 너와 같은 종이다. 경배는 하나님께 드려라”(요한계시록 19:10).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어디에다가도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를 그려놓았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분의 아드님 곧 왕자입니다. 그런 왕자님이 평민과 결혼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귀족과 평민이 따로 없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왕자님의 사자인 천사도 요한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지 마라, 나는 네 상전이 아니라 네 동료다!” 요즘이야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게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의 일입니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흑인과 백인의 구분이 명확했습니다. 세계 각 나라에서 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에서도 여자에게는 투표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2쳔 년 전에 평등세상을 주장하시고 실제로 그런 꿈같은 세상을 요한에게 계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 어떤 재판정

여기 계시에서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평소에도 그것을 끊임없이 가르치셨고, 몸소 모든 사람들을 전혀 차별하지 않고 똑 같이 대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서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 평등사상은 명확히 나타납니다. 임금이 의인들과 죄인들을 양쪽으로 갈라놓고, 먼저 의인들에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복음서 25:34-36). 이 말에 의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37-39). 임금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

이번에는 임금이 죄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41-43). 죄인들도 임금에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44). 임금이 그들에게도 똑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45). 이 이야기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교훈을 얻습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목마른 사람, 옥에 갇힌 사람을 잘 돌보아야 한다!’ 하고 말이지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 평등세상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여기서 그 정도의 교훈만을 얻어서는 안 되다는 것입니다. ‘나는 갑이고 너는 을이니, 나는 부자고 너는 가난하니,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으니, 내가 네게 은혜를 베푼다!’ 이런 자세를 버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몸에 병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바로 나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대할 때 나를 대하는 것과 똑같이 해야 한다!’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마르고 닳도록 강조하신 요점입니다. 요한복음서 15:15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를 때, ‘주님’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것은 ‘당신은 나의 주인이고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그것을 깨버리셨습니다. 천하의 예수님이 보잘것없는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이 홍세화 씨인데, 이분이 프랑스에 갔을 때 신기한 모습을 많이 보았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 초등학교의 교문에 쓰여 있는 글귀였습니다. 거기에는 ‘자유, 평등, 박애’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분은 그걸 한참이나 바라봤다고 합니다. ‘자유, 평등, 박애’란 프랑스 공화국의 국가이념이지요. 혁명이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나라 국기도 ‘청’ ‘백’ ‘홍’ 삼색기로 되어 있습니다. 각기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그 사람들이 공교육의 현장인 학교에서 자신들의 국가이념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끄러미 ‘자유, 평등, 박애’라는 세 낱말을 쳐다보면서 그는 상념에 젖었다고 회고합니다. “저렇게 긍정적인 가치를 강조하는구나!” 하고 말이지요. 그게 왜 신기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그가 6년 동안 다닌 국민학교 담벼락에 ‘반공, 방첩’이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 홍세화, ≪생각의 좌표≫(한겨레출판(주), 2009), 58쪽. 한 국가의 이념이란 거의 전 국민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국시(國是)가 ‘반공’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당신 좌우명이 뭐요?’ 하고 물었을 때, 예를 들어서 ‘말보다는 실천이다!’라든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라든지, 그런 것들이라면 그럴듯하지만, 인생의 좌우명이 ‘나는 옆집 아저씨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천박합니까?

■ 맺는 이야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근본정신은 ‘평등’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은 어디서든지 평등하게 대접을 받을 뿐만 아니라, 누구를 대하든지 주님을 대하듯이 평등하게 대접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43 가장 큰 가르침
242 가을 보약
241 가을 밤 외로운 밤
240 가을 밤
239 가시밭의 백합화
238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지 마라!
237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236 가난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35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234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십시오!”
233 “하나님을 만들어 주십시오!”
232 “하나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231 “평화가 있어라!”
230 “청춘을 돌려다오!”
229 “천둥과 같은 소리를 들으십시오!”
228 “주님보다 앞서 가서”
227 “주님께서 쉬시지 못하게!”
226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주신 기쁨”
225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224 “일출봉에 해 뜨거든”

LOGIN

SEARCH

MENU NAVIG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