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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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에베소서 3:14-19 
설교일 2013-06-09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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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 본문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십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3:14-19>


■ 들어가는 이야기

몸과 마음이 늘어지기 쉬운 계절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여름이 시작되면 몸을 보양하는 일에 마음을 많이 썼습니다. 어른들은, 더운 계절에는 밥 굶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양식과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을 것도 잘 챙겨 드시고, 책도 더 많이 읽고, 성경읽기와 기도도 더 열심히 해서, 힘겨운 계절을 가뿐하게 이겨내서 가을에 큰 결실을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사랑’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랑’ 하면 좀 머리가 아픕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선물을 많이 주셨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평화’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평화는 사랑에 빠져들 때까지만 유지된다.” ― 헬렌 피셔(정명진 역), ≪왜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가≫((주)생각의나무, 2005), 313쪽. 남녀가 사랑을 시작하면 그때부터 번뇌가 생깁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분쟁도 생깁니다. 잠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업보라면 기꺼이 감당해야지요.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바울은 그런 걱정이 없는 멋진 사람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가리켜서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의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겠습니다.

■ 계산하지 않는 사랑

첫째, 예수님의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원리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아마도 ‘계산’(計算)일 것입니다. 거의 모든 일을 사람 대신 기계가 다 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기계문명은 비정합니다. 철저하게 계산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최근에는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다만, 공중전화기 다 사용해보셨지요. 이 물건은 아무리 딱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동전이 떨어지면 매정하게 통화를 끊어버리고 맙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도 예전에는 돈이 없으면 외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요즘의 마트에서나 편의점에서는 그런 것이 일절 없습니다. 신용카드도 그렇습니다. 백만 원을 결재해야 하는데, 착오로 통장 잔고가 1원이라도 모자란다면 어김없이 연체거래가 되어 버립니다. ― 권중대, ≪사람 그리운 날에≫(수필과비평사, 2001), 123쪽. 이런 식으로 온 세상이 계산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직업의 귀천을 따질 때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말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선비가 으뜸이요, 땅과 함께 농사짓는 것이 그 다음이요, 기계를 만드는 것이 그 아래요, 장사하는 것을 가장 천하게 여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장사란 너무 계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장사가 으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셨을까요? 사실 예수님도 계산을 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계산법은 사람들의 것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비유가 ‘잃은 양’ 이야기입니다. 목자가 하루 종일 들에서 양을 먹이다가 저녁때 양떼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서 양의 숫자를 세어봅니다. 아침에 나갈 때는 백 마리였는데, 저녁에 보니 아흔아홉 마리밖에 없습니다.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여러분이 목자라면 이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계산기부터 두드려볼 겁니다. ‘양 한 마리가 없어졌다. 양 한 마리가 얼마지? 그래, 시세로 30만원. 그렇다면 양을 찾으러 나갔다 오는 비용은 얼마나 들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인건비를 계산하고, 위험부담에 따른 보험료를 계산하고, 성공확률을 계산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익이 난다고 결론이 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양을 찾으러 나설 것이고, 손해가 난다고 결론이 나면 미련 없이 양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것, 저런 것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양을 ‘물건’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생각하신 것이지요.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법입니다.

■ 관리하지 않는 사랑

둘째, 예수님의 사랑은 관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혹시 ‘밤비 신드롬’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밤비’란 밤에 오는 비가 아니라 사슴의 이름입니다. 오스트리아에 펠릭스 잘텐(Felix Salten, 1869.9.6~1945.10.8)이라는 작가가 있었는데, 이 사람의 소설 제목이 ≪밤비≫(Bambi)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물원에나 가야 볼 수 있지만, 유럽이나 미국의 국립공원에 가면 방목하는 아기 사슴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사슴의 눈이 참 외롭고 쓸쓸해 보이지 않습니까? 산책하던 사람들이, 측은한 마음도 들고, 꼭 인형 같이 귀엽기도 해서 아기 사슴을 쓰다듬어 주는 일이 간혹 있습니다. 좋은 뜻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만지는 것이 아기 사슴에게는 치명적인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미 사슴이 새끼를 낳으면, 처음 몇 주 동안은 오로지 냄새를 통해서만 자기 새끼를 알아본다고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다정스럽게 만진다고 해도 일단 사람의 손길이 닿고 나면 새끼 사슴의 몸에 사람 냄새가 베어듭니다. 엄마 사슴에게는 그 냄새가 새끼 사슴의 신분증인 셈인데, 사람의 손길이 닿으면 그걸 뺏어버리는 꼴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이세욱 임호경 역),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주식회사 열린책들, 2011), 331쪽.

결국 어미 사슴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귀엽다고, 좋은 뜻으로 만졌지만 사슴에게는 그게 삶을 망치는 결과를 낳습니다. 죽음을 불러오는 그런 만짐을 일컬어 ‘밤비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곡식과 가라지 비유 잘 아시지요. 일꾼이 주인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주인님, 밀밭에 가라지(독보리)가 잔뜩 났습니다. 이것 때문에 밀이 잘 자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 뽑아버립시다.” 그러나 주인은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농사짓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대하시는 방식을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세상에 못된 사람들도 섞여 살지요. 우리 생각 같아서는 그런 사람들을 가라지 뽑듯이 쏙쏙 다 뽑아내면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불만도 많았지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저런 사악한 인간들을 멀쩡하게 그냥 두시는가?’ 하고 말이지요. 사랑도 그렇습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방식대로 어떻게 좀 해보면 좋겠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그냥 두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관리’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해놓으신 상태 그대로를 존중하며 놓아두는 것, 그것이 예수님 방식의 사랑입니다.

■ 기대하지 않는 사랑

셋째, 예수님의 사랑은 기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했으니, 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해줄 거야!’ 하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누가복음서 14:12-14). 사람이 유명해지면 바빠집니다. 바빠지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같이 밥을 먹자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밥 먹자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을까요? 같이 밥을 먹으면 대화를 나누게 되겠지요. 그러면 서로 ‘아는 사이’가 됩니다. 알아두면 언젠가는 도움 받을 일이 있겠지요. 말은 안 하지만 다 그런 계산이 있어서 영향력 있는 사람과 함께 밥 먹는 것을 챙기는 것입니다.

요즘은 좀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신문이나 방송의 기자들은 어디 가서 밥 먹어도 밥값을 내지 않습니다. 그건 검사나 경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그런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한번은 기자와 검사와 학교 선생님, 이렇게 셋이서 음식점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모두 다 평상시에 밥값을 안 내는 사람들이지요. 그렇다면 밥값은 누가 냈겠습니까? 음식점 주인이 냈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밥 한 끼를 먹더라도 그 사람에게 덕 볼 것 같은 사람은 초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밥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은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권력을 행사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해서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고사하고, “지난번에는 당신이 밥을 샀으니, 이번에는 내가 사겠습니다!” 하며 밥 한 끼조차 변변히 살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초청해서 밥을 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은 ‘주는 대로 받는’(give and take) 사랑이 아닙니다. 갑은 을에게 베풀고, 을은 병에게 베풀고, 병은 정에게 베풀고…, 이렇게 돌고 돌면 끝내는 그 덕이 나에게까지 오게 됩니다.

■ 맺는 이야기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내용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 빌었습니다. 바울의 기도 제목은 ‘그들이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으로 하는 사랑은 계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상대를 ‘관리’하려고 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을 해놓고 그 대가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관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기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런 멋진 사랑을 한평생 만들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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