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일본의 기쿠치 박사(기쿠치 다이로쿠 菊池大麓: 1855∼1917)는 일본에 근대수학을 도입하였고 도쿄대학 총장, 문부대신, 교토대학 총장, 이화학연구소의 초대 소장 등을 역임하였고 일본표준시를 제정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분이 젊은시절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유학하던 때의 일입니다.
당시 기쿠치는 옥스퍼드대학의 유일한 동양인이었으므로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학교 안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시험이 있을 때마다 항상 1등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영국학생들의 자존심이 크게 상하였습니다. 영국학생 브라운은 언제나 기쿠치 다음인 2등만 차지하여 영국 학생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학기말 시험을 얼마 앞도 기쿠치가 독감을 앓게 되어 학교를 며칠 결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학교에 퍼지자 영국 학생들은 브라운이 1등 할 기회가 왔다며 몹시 흥분했습니다. 절호의 기회가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친구들은 브라운을 찾아가
"브라운 잘해, 그 원숭이 같은 작은 녀석을 보기 좋게 꺾어주라고!"
하고 격려하기까지 했습니다. 기말시험을 치루는 날, 기쿠치는 헬쓱한 얼굴로 학교에 나와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학교 게시판에 성적이 발표되었습니다.
게시판 앞에 와글거리며 모여 있는 학생들 틈에서 누군가 실망스런 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이런, 또 기쿠치가 1등이야!"
학생들은 크게 실망하며 한 숨을 쉬었습니다. 바로 이 때 기쿠치가 게시판 근처로 걸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서투른 영어로 말했습니다.
"내가 병석에 있으면서도 수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브라운 덕분입니다. 브라운은 매일매일 내 방에 찾아와 교수님이 하신 강의내용을 내게 강의해주었습니다."
모두들 숙연해졌습니다. 브라운은 그 기회를 살려 일등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쉬 뒤집어질 수 있는 1등 자리보다는 2등자리에 스스로 머물게 됨으로써 기쿠치가 도저히 넘어볼 수 없는 1등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기쿠치가 명성을 날리는 곳마다 브라운의 이름이 거론되기 때문입니다.
경북대 정충영교수(2002/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