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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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곳 2000.06.09 동아일보 허문명기자 
“부동산이 40억, 유가증권이 30억, 은행에 20억, 집이 10억원…. 100억원은 넘겠네요.”

L씨(37)는 자기의 재산규모를 이렇게 소개한 뒤 뜻밖에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입 합격자 발표를 보는 날 그랬듯 내 재산이 100억원이 넘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도 행복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도망치고 싶습니다.”

L씨는 이른바 벤처 열풍이 낳은 벼락부자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다니던 증권사를 나와 ‘홀로서기’를 해보겠다고 호기 부리다 고생도 많이 했다.

은행빚 전세금 중고차 1대. 퇴사 당시 그의 순자산은 4000만원이었다.

때마침 닥친 외환위기로 발까지 꽁꽁 묶였다.

낙천적인 성격이었지만

“큰아이를 미술학원에 보낼 6만원이 없다”

는 아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

택시를 몰 생각까지 했다.

그 무렵 아버지 회사마저 쓰러졌다.

화병을 얻은 아버지는 부도 후 한달 만에 돌아가셨고 반년 뒤엔 어머니마저 눈을 감았다.

절망이었다.

혼자 술을 마셨고 그때마다 울었다.

더 이상 무너져선 안된다는 생각에 이른바 ‘전주’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벌게 해줄 테니 나를 고용하라”

고 설득했다.

때마침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반년 동안 사채업자 3, 4명에게 30억∼40억원씩 안겨주는 대가로 받은 돈이 2억원. 이것이 종자돈이 됐다.

IMF로 직장을 잃은 옛 동료들이 너도나도 벤처회사를 만드느라 자금지원을 호소해 왔다.

과감하게 출자했다.

1000만∼2000만원씩 투자한 돈이 억대로 불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투자’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수십억원대 거부(巨富)가 돼 있음을 깨달았다.

벤처회사 사장들로부터

“그렇게 돈을 벌고도 셋집에 산다니 말도 안된다”

는 ‘질타’가 이어졌다.

‘그래, 부자는 부자답게 살아야지.’

우선 승용차부터 외제로 바꿨다.

집도 10억원짜리로 옮겼다.

골프도 배우고 회원권도 끊었다.

‘그가 대박을 터뜨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룸살롱 마담부터 대접이 달라졌다.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도 줄을 이었다.

실수해도 겸손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따랐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나 행복도 잠시, 예기치 않은 고민거리들이 생겼다.

우선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 정신이 나갔던 아내는 요즘 그를 의심한다.

만취해 돌아오면

“어느 여자랑 마셨느냐”

고 시비를 건다.

옛날엔

“얼마나 힘드느냐”

며 꿀물을 타주던 아내였다.

구두쇠였던 아내도 가정부를 들이면서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100만원이 넘는 비싼 옷도 사들였다.

친구들에게 한턱낸다며 한끼에 몇십만원씩 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L씨는 요즘 ‘아내에게 분명 애인이 생겼다’고 추측한다.

아이들도 달라졌다.

실직자였을 땐 과자 한 봉지에도 고마워하던 아이들이 고가(高價) 게임기가 전제되는 ‘부촌(富村)문화’에 젖어갔다.

의좋던 형제 사이도 소원해졌다.

“부자가 될 때까지 한마디 얘기도 없더니 사업자금도 못 대주느냐”

고 으르렁대는 동생과 제수씨들이 이제는 부담스럽다.

내친 김에 사업을 한번 크게 벌이느냐, 아니면 누구의 말처럼 인생관을 확 바꿔 이쯤에서 접고 베푸는 삶을 사느냐. 그것이 고민이다.

L씨는 요즘 너무 외롭다.

그는 불면증을 견디다 못해 지난달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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