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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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날 2001-12-17 
♥ 신랑의 독백

오늘은 내 결혼식 날이지만 내 제삿날 같은 기분이다. 수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얼마 전 헤어진 그 뇬이 제일 맘에 걸린다. 결코 잘살게 놔두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했었는데, 유비무환이라고 어렵사리 구한 방탄 조끼까지 입고 있지만, 그래도 왠지 불안하다. 내 옆에 지금 서있는, 청순~하고 예쁜 신부는 이런 맘을 모르겠지... 그녀는 그저 앞에 계신 주례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다. 차라리 오늘 밤 모든 걸 신부에게 털어놔? 그러다 첫날밤에 소박 맞으면 어쩌나.... 결혼은 제2의 출발이라고 하는데 어찌 영 불안하다.

♥ 신부의 독백

많은 하객들이 와주었다. 하지만 난 하객도, 내 옆에 서 있는 신랑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두 달 전에 심심해 폰팅 했는데 낯선 남자와 같이 잠을 잤다. 그 후로 있어야 할 생리가 아직 없어서 불안하다. 이렇게 건너 뛴 적은 없었는데... 순수하고 착한 내 신랑은, 이런 내 맘을 알리 없다. 그 날밤엔 정말로 쥑여줬었는데, 암튼 신랑이 알면 난 사망이다. 주례 선생님의 말씀이 안 들어온다. 이러다 속병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답답하다... 아흐~~

♥ 대기실의 또 다른 신랑의 독백

지금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신부는 나와 구면인 여자다. 나와 폰팅으로 만났는데... 어쩌면 인간이 저리 뻔뻔할 수 있는가? 정말 뻔뻔도 하여라. 그 옆의 신랑이 누군지 불쌍하다. 성이 개방되었다지만 어찌 저럴 수가 있는가... 식이 끝나고 나와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하다. 신부 화장을 하고 있는 나의 천사는 저 여자와 질적으로 다르다. 아무튼 그 옆의 신랑이란 놈은 불쌍도 하여라. 그래도 결혼해 달라고 애원했겠지?

♥ 대기실의 또 다른 신부

좀 전에 식 마치고 나간 주례 선생님 봤다. 내가 아르바이트할 때 나를 꼬실려고 무지 애쓴 노인네다. 나만한 딸자식이 있을 나이에 무슨 추태인가. 나도 별수 없이, 용돈 타 쓸려고 노인네를 따랐지만 역시 밤에는, 노인네일 뿐이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어제 그 노인네한테, 삐삐 왔다. 메시지가 왔는데 자기가 비아그라 먹었다고 밤에 나오라 그랬다. 정말로 미친 노인네다. 그나저나 성실한 우리 신랑, 오늘따라 듬직하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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